미얀마 선교 여행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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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선교 여행을 다녀와서
2017-12-22 김영기
지난 10월 29일부터 약 두 주간 미얀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이번 여행은 인도에서 오랫동안 사역하시던 정 선교사님과 미얀마에서 만나기로 했고 또한 개인적으로 5년간 소식을 주고 받았던 미얀마 원주민 사역자 뉴암 자매와 그 가족들을 만나기 위함도 있었다. 여행에 오르면서 나는 별 특별한 생각없었고 큰 기대도 하지 않은 채 선교지를 한번 돌아본다는 생각만 하였다.
미얀마 양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젊은 한인 선교사 한 분이 나오셔서 환영해 주었다. 그리고 뉴암 자매와 그 동생 무앙 형제가 또한 공항에 나왔다. 인도 정선교사님의 사역지에서 공부하고 있던 무앙 형제를 5년 전에 만났었고 그 형제가 누나가 인도하는 사역에 소개해 준 것이 뉴암 자매와 오랫동안 소식을 주고 받은 계기가 되었다. 뉴암 자매의 사역을 위해서 로스 앤젤레스에 소재한 대흥 장로교회가 5년 이상 건물 렌트비를 보조해 주는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미 많은 소식을 주고 받았기 때문에 직접 만나게 되니까 무척 반가왔다. 뉴암 자매의 유치원 사역을 위해 가져온 학용품들을 다 내어주고 나니 짐이 한결 가벼워 졌다. 미얀마에 도착하기 위해서 비행 시간이 24시간이상 걸렸는 데 현지에서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될 수록 비행기 안에서 잠을 자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침 9시에 도착하여 뉴암 형제를 만나니 그리 피곤하지 않았다. 그래서 뉴암 형제의 인도로 양곤의 몇 군데 관광지를 들러게 되었다. 처음 간 곳이 한국의 장관들이 폭탄 테러에 희생당한 아웅산 박물관이었다. 이국 땅에서 북한의 테러로 어이없이 생을 마감한 분들을 두고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다. 맞은 편에 있는 유명한 금빛 사원 Shwedagon Pagoda도 구경했는 데 많은 사람들이 경건하게 구경하는 모습이 그들의 신앙심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양곤에서 남동쪽 강 앞에 있는 Union National Rases Village가 인상적이었다. 미얀마의 7개 부족들의 집을 지어놓고 옷과 그릇등을 비치해 놓고 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미얀마라는 한 국가 안에서 7개 부족의 단합을 위해 세워진 마을인 데 뜻이 깊었다.
이튿날 뉴암 자매의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 타운홈 형식인 데 미국 타운홈보다 훨씬 작은 집에서 낮에 유치원을 운영하고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때는 불교 축제 행사들로 유치원 학생들이 불과 7,8 명만 와 있었다. 뉴암의 어머니와 이모되시는 분이 나를 위해 힘을 다해 기도해 주었고 또한 정성을 다한 점심 식사를 대접해 주었다. 그 집의 부엌을 보니 냉장고나 레인지는 없고 싱크대만 달랑 있었다. 음식은 포터블 전기 곤로로 하는 모양인데 어떻게 아무 것도 없는 데에서 여러가지의 음식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 기적같이 여겨졌다. 뉴암 자매의 여동생과 보지못한 막내 남동생도 만났다. 전 식구들이 새벽 기도회를 가지고 아침부터 유치원을 운영하고 오후에는 미얀마 대학을 다니기 위해 나갔다고 저녁에 와서 다시 매일 저녁 예배를 드리면서 모두들 바쁘게 살고 있었다. 우리 교회 허근 성도님과 김연수 권사님이 하신 선교 헌금을 뉴암 자매 가족이 인도하는 교회 앞으로 전달하였다.
도착한 이튿날 한국에서 정 선교사님이 도착하셨고 우리는 반갑게 같은 호텔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정 선교사님은 인도에서 30여년 간 교육 사역을 크게 하셨고 신학교 사역도 성공적으로 해 오신 분이다. 최근에 인도의 힌두화 운동에 밀려 비자 갱신을 받지 못하고 한국에서 계시다가 미얀마를 방문하시게 되었다. 정 선교사님은 30여년 간의 신학교 사역을 통해 미얀마 신학생들을 300명을 배출하였다. 그 중에 연락이 닿는 졸업생들을 만나서 미얀마에서도 신학교육 사역을 시작할 생각이 있으셔서 이번에 오시게 된 것이다.
마침 이 기간에 로스 앤젤스의 온누리 교회가 양곤에서 5시간 북쪽에 떨어진 Payay라는 도시에서 일대일 양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에 정 선교사님과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그 곳에 참가하기로 했다. 동행은 정선교사님 부부, 운전으로 수고한 로리안 탕 목사, 그리고 50대의 파오 목사님이었다. 탕 목사님은 일제 중고 미니밴을 최근에 구입했는 데 모양이 새 차같이 깨끗하고 성능이 우수하였다. 가는 길이 좋지 않고 또 불교 축제가 있어서 5시간 걸리는 길이 무려 7시간이나 걸려 밤 중에 도착하였다. 길에서 보는 미얀마 사람들은 순박해 보였고 시골 음식점은 일인당 2불 정도로 무척 싼데도 음식이 괜찮았다.
파오 목사님과 탕 목사님은 인도 정선교사님의 신학교 졸업생들이었다. 파오 목사님은 긍정적인 사고에 책임성이 강한 신실한 목사님이라고 들었다. 파오 목사님은 인도에서 신학교 공부를 하고나서 계속 인도 선교부의 직원이 되어 학교 건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탕 목사님은 30대 초반의 항상 미소짓는 젊은 목회자였다. 이틀간 여행하면서 한번도 찡그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탕 목사님은 삼촌이 담임 목사로 있는 큰 교회의 부목사로 있으므로 경제적으로 다른 목회자들보다 좋은 편으로 보였다.
금요일 아침부터 온누리 교회 일행과 아침 식사를 시작하면서 일대일 양육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다. 주최하는 침례교회는 인근의 목회자들과 청년들을 초청하여 교육을 받게 했다. 강사들이 한국말을 하면 한국에 유학갔던 원주민 목회자 사모가 유창하게 미얀마 말로 통역을 하였다. 프로그램의 주강사는 정선교사님의 맏아들 아브라함 목사님인데 영어로 시원하게 강의하는 것이 한인으로서 자못 자랑스러웠다. 끝나면서 참석자들이 전도의 도구를 잘 배우게 되었다는 간증들을 많이 하였다. 교회에서 대접하는 점심식사를 들면서 시골의 인심좋은 시골 교회 분위기에 마음이 편안하였다.
길이 멀기 때문에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바로 양곤으로 우리 일행은 향하였다. 올 때 시간이 너무 걸려서 될수록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속도를 내어서 달렸다. 거의 모든 길이 1차선밖에 되지 않고 또 운전석이 차의 오른 쪽에 있는 데 차들도 길의 오른 쪽에서 달렸다. 앞 차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왼쪽 반대 방향의 길로 들어가서 앞차를 추월하고 다시 오른 쪽으로 옮겨야 했다. 내가 운전을 도우기 위해서 왼쪽 앞 좌석에 앉아서 반대쪽 방향 차들이 있는 지 망을 봐 주었다. 추월하려다가 속도가 늦으면 반대방향의 차와 정면 충돌할 위험이 여러 번 있었는 데 무사히 사고내지 않고 양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토요일 아침 정선교사님의 초청으로 인도 신학교 졸업생들이 우리 숙소 식당으로 몰려 왔다. 모두 35명 정도가 모였다. 그 중에는 10여년 전에 졸업한 분도 있고 최근에 졸업한 분들도 있었다. 정선교사님이 신학교에서 하듯이 영어로 찬양을 시작하면 모두 따라서 부르면서 찬양 부흥회가 이루어 졌다. 정 선교사님은 미얀마에서 본격적인 신학교가 시작될 것이라는 취지를 설명하셨다. 아들 아브라함 목사님이 적극 동참하고 나는 정선교사님의 초청으로 상당한 후원자 위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인도에서 학생 수련회를 9년 간 미주에서 하였듯이 미얀마에서도 학생 수련회를 시작할 필요성을 말하였는 데 젊은 목회자들에게서 상당한 기대와 호응을 받았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바쁜 분들은 돌아갔으나 반 정도의 참석자들이 10여년 전에 정선교사님의 선교회에서 구입한 부지를 보러 트럭을 한 대 빌려서 가게 되었다. 지붕이 있는 용달 트럭에 디귿자 형식으로 긴 의자가 설치되어 있는 데 미얀마 사람들이 이 트럭에 15명 이상 편리하게 타고 다니고 있었다. 호텔에서 북쪽으로 한시간 정도 걸려 외지인 Hmawbi에 있는 부지에 도착하였다. 부지 근처는 콘크리트 길이 아닌 그냥 진흙 길 그대로였다. 지금은 미얀마 부동산이 미국 대도시 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올라 있으나 10여년 전에는 6에이커되는 부지를 불과 만불에 구입하였다고 한다. 이 일을 파오 목사님이 진행 했는 데 지금은 백만불 정도 가치가 있다. 인도에서 계시던 정선교사님이 어떻게 미얀마에 큰 부지를 구입하실 생각이 있으셨는 지 그 원대한 꿈과 계획은 탄복할 수 밖에 없다.
건물 부지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감개무량하여 돌아 보았고 오두막 옆 그늘에서 그 곳에 좋은 신학교가 세워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였다. 우리 모두가 다 재정적인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것을 믿고 간구하였다. 오두막에서 사는 청년은 부지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은 파오 목사님의 조카이었다. 그는 Dragon Fruit이라는 열대 식물을 재배하고 있는 데 무화과 비슷한 데 더 크고 안이 빨간 열매를 주어서 우리들이 맛보았다.
주일날이 되어 나는 두 군데 현지 교회를 방문할 수 있었다. 정 선교사님은 다른 교회에 가셔서 설교하시고 나는 정선교사님의 사모님과 파오 목사님 교회를 갔다. 파오 목사님이 직접 지은 아담한 교회가 참 인상적이었다. 벽돌 건물로 지었고 한 층을 더 올려 손님 방을 만들 작정이라고 들었다. 예배는 인도에서 배운 대로 파오 목사님이 예배 중 학생들에게 성경 암송을 시켰다. 학생들이 30명, 어른들이 10명 정도 되는 교회인데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혀 순수하게 찬양하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사회 중 파오 목사님은 정선교사님의 사모님을 소개하는 데 자신이 인도에 있을 때 마치 어머님과 같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기도 했다. 정선교사님에게는 파오 목사님이 믿음의 아들이었다. 설교는 내가 담당했는 데 삭개오의 변화에 대한 말씀을 잘 들어 주어서 감사했다. 예배 후 친교 식사도 참 정갈하고 좋았다.
파오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고 나서 우리는 한 시간 남짓 북쪽이고 양곤 공항 서쪽에 위치한 뉴암 자매의 교회로 향했다. 뉴암 자매도 정선교사님의 신학교 졸업생이었다. 며칠 전에 가 본 그 좁은 집을 다시 들어 갔는 데 오후 4시에 드리는 예배에 얼마나 사람이 올까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뉴암 자매 교회는 오전에 미얀마 인들을 위한 예배를 11시에 드리고 오후 3시에 다시 친족을 위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우리 도착 시간 때문에 그 날은 오후 4시로 연기해서 드린다고 하였다. 오후 4시 경이 되자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 오는 데 얼마되지 않아 30여명의 아이들이 들어왔고 어른들도 5,6명이 들어 왔다. 나중에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는 무앙 형제가 5,6명의 청년들을 더 데리고 예배에 참석하였다.
뉴암 자매 교회는 또 다른 생동감이 있었다. 뉴암 자매의 동생 룬이 율동과 함께 찬양 인도를 하는 데 아이들이 좁은 방에서 아주 즐겁게 율동하면서 찬양을 불렀다. 반주는 기타로 하지만 하나님의 기쁨이 그 방에서 넘쳐났다. 나는 오래된 교회들이 너무 조용하게 드리는 예배보다 이렇게 천진 난만하게 찬양하는 아이들의 예배에 하나님께서 더 가까이 하심을 보았다. 예배 후 아무것도 없는 부엌에서 여러가지 성찬이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골목길에서 보니 동네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전부 그 날 예배 참석한 것으로 보였다. 작지만 복음 전도에 이 교회는 확실한 열매들을 이미 거두고 있었다.
뉴암 가족이 유치원과 교회 사역을 통해서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영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꼬마가 꿈에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하는 데 뉴암 가족은 그것을 기쁘게 듣지만 그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기독교에 들어가기 싫어서 유치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하지만 한번이라도 어릴 때 교회 나온 경험이 있는 아이는 결국 하나님께 나오게 된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그 어린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아이는 가정 불화로 뉴암 자매의 교회를 자기 집으로 여기고 그 곳에 오면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어떤 청년은 술과 마약에 폐인이 되어 사경을 헤메다가 뉴암 가족의 기도로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이 가족은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당연히 나타나는 것으로 믿고 있다.
뉴암 자매의 교회는 파오 목사님의 교회와 달리 교회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옆집들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이기 때문에 예배드리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다. 바로 옆집 사람이 이슬람교도인데 얼마나 여러번 경찰에 신고했는 지 경찰이 와서 방음 시설을 하고 문을 닫고 예배 드릴 수 밖에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 더운 나라에 에어콘이 없는 집에서 창문을 닫으면 그 더위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우리 때문에 이런 제한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찬양을 크게 부르도록 놓아 두었는 데 그 다음 날 역시 또 경찰에 불평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뉴암 자매의 교회는 집주인이 집을 팔려고 내어 놓았다고 한다. 만일 집이 팔리면 지금까지 모여오던 교회는 닫고 새로운 지역에 가서 시작해야 하는 데 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려움이다. 그 집을 구입하려면 미화 5만불이 필요한 모양인데 기도 제목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뉴암 자매로부터 받은 소식은 집이 팔렸지만 새 주인이 뉴암 자매 가족이 그 곳에서 세로 계속 살도록 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밀하게 도와 주심을 감사한다.
월요일에 탕 목사님의 집 근처에 빈 시설이 있는 데 그 곳에 신학교를 시작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해서 인도 신학교 졸업생 몇 명이 모여서 그 곳을 방문하였다. 찾아 가 보니 이층으로 된 건물이 하나 있고 그 옆에 300명이 들어갈 규모의 예배당도 잘 지어져 있는 데 아무도 쓰지 않고 비어 있다고 한다. 창고에서 보니 블루 미션이라는 단체에서 건축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이런 훌륭한 장소를 빌려 쓸 수 있으면 당장 신학교도 시작하고 뉴암 자매같이 교육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학교를 시작해도 휼륭하게 보였다. 찾아간 우리 일행은 그 시설을 쓸 수 있도록 하나님께 뜨겁게 기도하였다. 마침 파오 목사님이 그 곳 주인을 알고 있어서 우리가 돌아 온 후 만나 보았는 데 다행히도 그 건물을 빌려 쓰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께서 미얀마 복음화를 위해 정선교사님을 계속 들어서 쓰시는 것이 눈으로 보였다.
그 건물에서 골목 건너편에 탕 목사님의 집이 있었다. 탕목사님의 사무실에 가보니 양곤 전체 지도가 벽에 있고 지교회와 사역을 위해 많은 표시들을 해 놓았다. 탕 목사님의 집에서 쉬면서 우리는 미얀마 선교 사역을 위한 조직을 하게 되었다. 동행한 사람들이 10여명인 데 정선교사님으로서는 누구를 이사로 초청하고 누구는 빼면 곤란해서 며칠 망설이고 계셨다. 그런데 나도 그 날 저녁 비행기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제안하기를 모든 신학교 졸업생들이 정선교사님의 지도를 기꺼이 받을 줄로 알기 때문에 정선교사님이 초대 이사들을 지명하도록 부탁하고 참석자들이 이의 없도록 했다. 그래서 파오 목사님, 탕 목사님, 빌리 목사님, 뉴암 자매, 에스더 자매 5명이 이사로 수고하게 되었다.
며칠 간 정선교사님 부부와 함께 여행하면서 지난 30여년간 인도 선교지에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 지 일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가 본 인도 학교는 건물이 4층짜리 큰 건물을 5개 지을 수 있었는 데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사업하시는 분들을 동시 다발적으로 보내셔서 정선교사님의 헌신적인 교육 선교 사역 현장을 보게 하시고 1억원씩 헌금할 마음을 주셨다. 이렇게 된 헌금들이 학교 건물들을 건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미얀마 선교 건물 건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또 역사하실 줄 정 선교사님은 믿으셨다.
과거에 큰 역사를 이룩하셨지만 지금은 70대 후반의 연세에 미얀마에서 새로 선교 사역을 시작하시는 데 후원 부분에 어려운 점이 있다는 말씀을 정 선교사님 사모님으로 부터 들었다. 그래서 함께 있는 며칠 동안 정선교사님은 새로 시작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시지만 사모님은 많은 고민과 갈등의 모습을 보이셨다. 그 전날 아들 아브라함 목사님과 세 식구가 밤새 의논하고 기도하셨는 지 토요일 졸업생들이 모였을 때 사모님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힘있게 올리시고 눈에는 불꽃이 튈 것같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단호히 선언하시는 데 너무 감명을 받았다.
정 선교사님 부부는 별로 힘도 없는 나에게도 큰 기대를 가지시고 계셨다. 70대 후반에 이제 사역을 쉬셔도 될 연세에 새로운 결심을 하심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을 내 힘 자라는 대로 도우는 것도 믿음이라고 여겨서 최대한 도울 수 있도록 해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이번 미얀마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미국에서 사는 우리는 너무나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발견한다. 미얀마는 부동산은 엄청나게 올랐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미국 생활의 10분의 1정도이고 아직도 가전 제품들은 가지지 못한 채로 살고 있었다. 특별히 90 펴센트
이상이 불교를 믿는 사람들 속에서 복음 전하기 위해 애쓰는 목회자들의 생활은 참으로 힘들어 보였다. 그 만큼 미국에서 온 나에게 기대하는 것도 커 보였다. 앞으로도 교회 개척을 위해 선진 국가에서 사는 성도들이 한
가정 당 한 교회를 위해 필요한 대로 도울 수 있으면 이런 국가들에 복음 전하는 길이 더욱 활발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곳에서 생활비를 조금 절약하면 하늘나라를 위해 필요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미얀마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복음을 위해 씨를 뿌리는 일을 하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생활이라고 믿는다.